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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리흐 야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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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리흐 야고다는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시계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볼셰비키에 가담한 후, 1920년부터 비밀 경찰 체카에서 활동하며 굴라그의 감독을 담당했다. 1934년 내무 인민 위원부의 초대 장관이 되어 대숙청을 주도했으나, 스탈린과의 갈등으로 인해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야고다는 굴라크 시스템을 확장하고 모스크바 재판을 조직하는 등 권력을 행사했지만, 결국 숙청되어 사후 재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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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리흐 야고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6년의 야고다
원어 이름(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출생 이름예노흐 게르셰비치 이예구다
출생일1891년 11월 7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
사망일1938년 3월 15일
사망지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국적소비에트 연방
배우자이다 아베르바흐(1914년 결혼)
겐리흐 야고다의 서명
정치 경력
소속 정당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17년–1937년)
주요 직책
직책내무인민위원
임기 시작1934년 7월 10일
임기 종료1936년 9월 26일
총리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이전 직책뱌체슬라프 멘진스키 (국가정치총국 의장)
후임니콜라이 예조프
직책 2우편전신인민위원
임기 시작 21936년 9월 26일
임기 종료 21937년 4월 5일
이전 직책 2알렉세이 리코프
후임 2이노켄티 할렙스키
훈장
훈장

2. 초기 이력

겐리흐 야고다는 1891년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에서 유대인 시계 제작자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31] 그의 본명은 '''게나흐 게르셰노비치 야고다'''(Генах Гершенович Ягодаru)이다.

1907년 15세의 나이로 볼셰비키에 가담하였으며,[31] 1912년에는 체포되어 심비르스크로 추방되기도 했다.[31]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군에 징집되어 참전 중 부상을 입었다.[31]

1917년 10월 혁명 이후 1920년부터 비밀 경찰 조직인 체카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으며,[31] 점차 조직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아래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경력을 쌓아갔다. 1920년대 말에는 멘진스키의 건강 악화로 실질적으로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으나, 1931년에는 잠시 지위가 강등되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계

1912년 경찰 정보 카드에 있는 야고다


겐리흐 야고다는 1891년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현 루이빈스크)에서 유대인 시계 제작자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31][1] 그의 본명은 '''게나흐 게르셰노비치 야고다'''(Генах Гершенович Ягодаru)였으며, 예노흐 게르셰노비치 예후다(Енох Гершенович Иегуда)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31] 그는 보석상의 아들이자 통계학을 전공했으며 약제사 조수로 일했다고 전해진다.[1]

야고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4세 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지하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며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2] 15세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소르모보 구역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전투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2] 같은 해인 1907년볼셰비키에 가담했다.[2][31] 그는 16세 또는 17세에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볼셰비키 활동으로 1911년 체포되어 추방되었다고 밝혔다.[2]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11년 모스크바에 상경했으나 1912년 체포되어 심비르스크로 추방되었다고도 한다.[31]

1913년, 야고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푸틸로프 제철소에서 일했으며,[3] 같은 해 잡지 "통계 문제"에서도 활동했다.[31]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제5군단 제20저격연대 소속으로 참전했고,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3][31]

그러나 전직 NKVD 장교였던 알렉산드르 M. 오를로프는 야고다가 자신의 초기 혁명 경력을 날조했으며, 실제로는 1917년까지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를로프는 야고다의 부관이었던 미하일 트릴리세르가 이러한 거짓말을 폭로하려다 해고되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4]

한편, 1914년에 이다 아벨바흐(Ида Леонидовна Авербах|이다 레오니도브나 아베르바흐ru)와 결혼했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그녀의 나이가 9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31]

2. 2. 혁명 가담



야고다는 1891년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에서 유대인 시계 제작자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31] 그의 본명은 '''게나흐 게르셰노비치 야고다'''(Генах Гершенович Ягодаru) 또는 예노흐 게르셰노비치 예후다(Енох Гершенович Иегудаru)이다.

그는 14세 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지하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며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1] 15세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소르모보 구역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전투 부대원으로 활동했으며,[2] 1907년 15세(또는 16-17세)의 나이로 볼셰비키에 가입했다고 알려져 있다.[2][31] 1911년(또는 1912년) 체포되어 심비르스크로 추방되었다.[2][31] 1913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푸틸로프 제철소에서 일했다.[3]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대하여 제5군단 제20저격연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3][31]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 군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솔다츠카야 프라브다'(병사의 진실) 신문 발행에 참여했고, 10월 혁명에도 가담했다.[31] 혁명 이후에는 '크레스티얀스카야 베드노타'(빈농) 신문의 편집장을 지냈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노동자 농민 적군 최고 군사 감사국 총무국에서 근무했다.[31] 1920년부터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비밀 경찰인 체카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31]

한편, 전직 NKVD 장교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는 야고다가 자신의 초기 혁명 경력을 조작했으며 실제로는 1917년에야 볼셰비키에 가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2. 3. 체카 활동

야고다와 그의 아내 이다 아베르바흐, 1922년


왼쪽부터 야고다,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펠릭스 제르진스키, 1924년


1922년 야고다가 직접 서명한 출국 비자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창설된 비밀경찰인 체카1920년 합류하였다. 이후 체카와 그 후신인 국가정치국(OGPU), 내무인민위원회(NKVD)에서 빠르게 승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9월,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 아래서 제2부국장이 되었고, 1924년 제르진스키가 다른 직책으로 옮기자 야고다는 국가정치국(OGPU)의 부국장이 되었다. 당시 의장이었던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는 건강 문제로 실권이 거의 없었기에, 야고다가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야고다는 이오시프 스탈린과는 1918년부터 알고 지냈으나, 스탈린의 완전한 측근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스탈린의 농업 집산화 정책 추진 당시에는 니콜라이 부하린 등 당내 우파와 교감하기도 했으나, 우파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자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꿨다. 부하린의 아내 안나 라리나는 야고다가 "자신의 경력을 위해 개인적인 견해를 거래"했다고 비판했다.[7]

1931년 7월, 구 볼셰비키 출신 이반 아쿨로프가 제1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야고다는 제2부의장으로 잠시 강등되었다. 그러나 야고다 세력은 아쿨로프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며 조직적으로 그의 업무를 방해했고,[8] 결국 아쿨로프는 해임되어 야고다는 1932년 10월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스탈린은 훗날 OGPU/NKVD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 숙청에 4년이나 뒤처졌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야고다의 복귀를 마지못해 승인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야고다는 레프 트로츠키의 지지자였던 야코프 블룸킨 처형에 관여했으며, 다른 반대파들을 굴라크로 보냈다.

야고다는 굴라크(수용소 총국) 시스템의 감독 및 확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이전까지 소련의 주요 노동 수용소는 솔로프키 감옥 수용소 정도였으나,[9] 야고다의 지휘 아래 수감자 수는 급증했다. 1929년부터 1930년 사이 OGPU 수용소의 수감자 수는 22,848명에서 155,000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 11월 이후 이는 굴라크 시스템으로 관리되었다.[13] 그의 지휘 아래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이 강제 노동을 통해 기록적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1931년부터 1933년 사이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0] 이 공로로 야고다는 레닌 훈장을 받았다.[12] 또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시작했으며,[11] 베레즈니키 화학 공장 건설 등 다양한 사업에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강제 노동 시스템을 크게 확대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활용할 수 있도록 OGPU 산하 비밀 독극물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야고다가 자신의 상사였던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를 조수들을 시켜 독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14] 건강이 좋지 않았던 멘진스키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조작된 증언일 가능성도 있다. 멘진스키 사망 다음 날에는 막심 고리키의 아들 막스 페쉬코프가 사망했는데, 야고다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고리키 부자를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다.[17] 야고다는 1928년부터 고리키와의 관계를 관리했으며, 그의 비서 표트르 크류치코프를 정보원으로 고용하여 고리키의 동향을 스탈린과 정치국에 보고하게 했다.[15]

1934년 7월, 멘진스키 사후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창설되자 야고다는 초대 내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대숙청의 초기 단계를 지휘하며 스탈린 반대파 숙청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야고다가 키로프 암살범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교류하며 자금을 지원했고, 이를 이용해 키로프를 암살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야고다의 숙청 방식이 미온적이라고 판단했으며, 특히 올드 볼셰비키들에 대한 자백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자 그에게 실망감을 나타냈다. 결국 1936년 9월, 야고다는 내무인민위원에서 해임되고 니콜라이 예조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3. 내무인민위원장

1934년 7월 10일, 전임자 뱌체슬라프 멘진스키가 사망한 지 두 달 만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야고다를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수장인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자리는 정규 경찰과 비밀 경찰 모두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18] 야고다는 개인적으로 도박과 여성 편력 등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훗날 숙청 과정에서 멘진스키 독살 혐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 발생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도 있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야고다는 키로프 암살 사건 조사를 명분으로 삼아 대숙청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36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레프 카메네프 등이 기소된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을 조직했으며, 강제수용소 시스템인 굴락을 크게 확장시켜 수감자들의 강제 노동을 소련 경제 개발에 동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점차 야고다의 업무 수행 방식, 특히 반대파 숙청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19] 스탈린은 야고다가 소비에트 반대 블록과 같은 조직을 적발하는 데 뒤처졌다고 판단했다.[21] 결국 1936년 9월, 스탈린은 야고다를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니콜라이 예조프를 임명했다. 예조프는 이후 더욱 가혹한 방식으로 대숙청을 이끌었다. 야고다는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되었다.

3. 1. 취임과 권력 장악

1920년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비밀 경찰 체카에 소속되어 빠르게 승진했다. 1923년 9월에는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제2 부국장이 되었고, 1924년 1월 제르진스키가 다른 직책으로 옮겨간 후에는 국가정치국(OGPU)의 부국장이자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의장이었던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는 심각한 질병으로 실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야고다가 실질적인 책임자였다.[5]

야고다는 1918년부터 이오시프 스탈린과 알고 지냈으나, 전적으로 스탈린의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를 강행할 때, 야고다는 처음에는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 당 우파에 동조하는 듯했으나, 권력 투쟁에서 우파가 밀리자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꿨다. 부하린의 아내 안나 라리나는 야고다가 "자신의 경력을 위해 개인적인 견해를 거래"한 "범죄자"이자 "비참한 겁쟁이"라고 비판했다.[7]

1931년 7월, 구 볼셰비키 이반 아쿨로프가 OGPU 제1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야고다는 제2 부의장으로 잠시 강등되었다. 그러나 OGPU 내부 조직은 아쿨로프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며 그의 업무를 방해했고,[8] 결국 아쿨로프는 해임되고 야고다는 1932년 10월에 복귀하여 다시 실권을 잡았다.

야고다는 OGPU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굴락(ГУЛАГ, 수용소 총국) 시스템을 창설하고 확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이전까지 소규모였던 솔로프키 감옥 수용소[9] 외에, 그는 강제 노동을 이용한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기록적인 속도로 건설된 백해-발트해 운하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0] 이 공로로 그는 후에 레닌 훈장을 받았다.[12]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 역시 그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11] 이러한 강제 노동 동원은 OGPU 수용소 인원을 1929년 22,848명에서 1930년 155,000명 이상으로 급증시켰고, 1930년 11월 이후 이 시스템은 굴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3]

또한 야고다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OGPU의 비밀 독극물 연구소를 설립했다.[14] 그의 전임자였던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는 1934년 5월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심장 질환으로 발표되었으나 이후 야고다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멘진스키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4] 멘진스키가 오랫동안 앓아왔다는 점에서 이는 조작된 증언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의 죽음은 야고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막심 고리키와 그의 아들 막스 페쉬코프의 죽음에도 야고다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다.[17]

멘진스키가 사망한 지 두 달 만인 1934년 7월 10일, 야고다는 체카의 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초대 인민위원(장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그는 도박과 여성 편력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취임은 대숙청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같은 해 12월 발생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에도 야고다가 배후에서 개입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다.

3. 2. 굴라크 설립과 확장

1920년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비밀 경찰 체카에 소속된 야고다는 뱌체슬라프 멘진스키의 오른팔로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9월에는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제2 부국장이 되었고, 1924년 1월 제르진스키가 최고 국민 경제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자 국가정치국(OGPU)의 부국장이자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의장이었던 멘진스키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실권이 거의 없었다.[5]

야고다는 소련의 강제 노동 시스템인 굴라크(ГУЛАГ, 수용소 총국)의 설립과 확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9년 이전까지 소련의 유일한 노동 수용소는 OGPU 관할 하의 솔로프키 감옥 수용소였다.[9] 그러나 야고다는 OGPU 부국장으로서 감옥 노동력의 사용을 크게 확대했다. 특히 1931년부터 1933년 사이에는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을 강제 노동을 동원하여 기록적인 속도로 완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0] 이 공로로 야고다는 후에 레닌 훈장을 받았다.[12]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 역시 그의 지휘 하에 시작되었으나, 완공은 그의 몰락 이후 후임자인 니콜라이 예조프에 의해 이루어졌다.[11] 야고다는 베레즈니키 화학 공장을 비롯한 여러 건설 프로젝트에도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강제 노동 시스템의 확대로 인해 OGPU 수용소의 수감자 수는 급증했다. 1929년 22,848명이었던 수감자 수는 1930년에는 155,000명으로 늘어났으며, 1930년 11월 이후 이 시스템은 주요 수용소 관리국(GULAG)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3]

야고다는 1931년 7월 잠시 제2 부의장으로 강등되었다가 1932년 10월 OGPU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복귀했다.[8]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야고다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과 같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소극적이라고 여겼다. 스탈린은 OGPU/NKVD가 이들을 근절하는 데 4년이나 뒤처져 있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야고다가 트로츠키 지지자 중 한 명인 야코프 블룸킨의 처형에 관여하고 다른 반대파들을 굴라크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평가였다. 야고다는 또한 스탈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OGPU의 비밀 독극물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14]

3. 3. 대숙청 주도

1934년 7월 10일, 뱌체슬라프 멘진스키가 사망한 지 두 달 만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야고다를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직위는 정규 경찰과 비밀 경찰(NKVD) 모두를 감독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18] 야고다는 도박과 엽색 행각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훗날 그가 숙청될 때 멘진스키 독살 혐의가 죄목에 포함된 점으로 미루어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

1930년 책상에 앉아있는 야고다


야고다는 1934년 키로프 암살 사건의 조사를 책임졌고, 이를 계기로 레프 트로츠키,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이 연루된 소비에트 반대 블록의 존재를 "밝혀냈다".[18] 그는 안드레이 비신스키와 협력하여 1936년 대숙청의 시작을 알린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을 연출했으며, 이 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야고다는 또한 강제수용소 시스템인 굴락을 처음으로 설립하고 대규모로 확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13] 그의 지휘 아래 1934년부터 1935년까지 25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굴락의 강제 노동은 소련 경제의 주요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야고다는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을 강제 노동을 동원하여 기록적인 속도로 완수했으며, 이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기도 했다.[10][12]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 역시 그의 지휘 하에 시작되었다.[11]

야고다(가운데)가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시찰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있다.


야고다는 붉은 군대 내부 숙청에도 관여하여 군 고위 간부들을 제거했는데, 이는 이후 더 큰 규모로 벌어질 소련 군대 숙청의 전조가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점차 야고다의 일 처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스탈린은 야고다가 키로프 암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과거 제정 러시아 비밀경찰인 오흐라나와 연결시키려는 증거 조작에도 실패했다고 여겼다.[19] 또한, 1936년 중반 야고다가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해외의 부정적 여론과 처형된 이들에 대한 동정 여론을 보고하자 스탈린은 격노했다. 스탈린은 이를 야고다가 숙청, 특히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소련 원수에 대한 숙청을 중단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였다.[19][20] 미하일 톰스키가 숙청 대상이 될 것을 알고 자살하면서 야고다가 자신을 반대 노선으로 이끌었다고 증언하라고 유언을 남긴 것도 야고다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을 키웠다. 스탈린은 야고다가 소비에트 반대 블록의 존재를 더 일찍 보고하지 않은 점도 문제 삼았다.[18]

결국 1936년 9월 25일, 스탈린은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함께 정치국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우리는 예조프 동지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야고다는 분명히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을 폭로하는 데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GPU는 이 문제에 대해 4년이나 늦었다. 지역의 모든 당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NKVD 요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1]


다음 날 야고다는 내무인민위원에서 해임되고 니콜라이 예조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더욱 가혹한 대숙청을 실행했다. 야고다는 소련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되었다. 야고다가 반대 블록에 대해 늦게 보고한 이유에 대해서는, 1936년에야 알게 되었다는 설과,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반대파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은폐했다는 설이 있다.[18] 반공주의자이자 소련 탈주자인 그리고리 토카예프는 반대파가 경찰 일부 및 야고다와 협력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2][23]

1937년 3월, 야고다는 후임자 예조프에 의해 체포되었다. 예조프는 야고다파 NKVD 대원들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을 열차로 이동시키던 중 매복하여 체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야고다는 혹독한 취조 끝에 스파이 혐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혐의를 "자백"했다. 1938년 3월, 그는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과 함께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필사적인 사면 요청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과거 자신의 별장이었던 코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가족 대부분과 약 3,000명에 달하는 야고다파 NKVD 대원들도 숙청되었다. 모스크바 재판의 다른 희생자들은 대부분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야고다는 유일하게 명예 회복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4. 몰락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물러난 후 우편통신부 장관으로 좌천되었으나, 1937년 3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과거 부하린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공개 재판에서 스탈린의 정적 처리 방식에 대해 암시하는 발언을 한 것이 스탈린의 분노를 산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3월, 야고다는 소위 "21명의 재판"에서 국가 반역 및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처형되었으며, 처형 전 당시 내무인민위원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의 명령으로 심한 구타와 모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조프와 그의 후임자 베리아 역시 훗날 숙청되어 처형당했다.

4. 1. 스탈린과의 갈등

이오시프 스탈린과 야고다는 1918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야고다는 "결코 스탈린의 사람이 아니었다".[7]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를 강행할 때, 야고다는 니콜라이 부하린이나 알렉세이 리코프와 같은 당내 우파 반대자들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7] 1928년 7월, 부하린은 사적인 대화에서 "야고다와 트리실러가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했지만, 우파가 권력 투쟁에서 밀리자 야고다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꿨다. 부하린의 미망인 안나 라리나는 야고다가 "자신의 경력을 위해 개인적인 견해를 거래"했으며 "범죄자"이자 "비참한 겁쟁이"로 타락했다고 평가했다.[7] 이러한 야고다의 행보는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나 있었다.

1931년 7월, 구 볼셰비키였던 이반 아쿨로프가 국가정치국(OGPU) 제1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야고다는 제2 부의장으로 강등되었다. 야고다의 동료들은 아쿨로프를 적대시하며 그의 업무를 방해했고,[8] 결국 아쿨로프는 해임되고 야고다는 1932년 10월에 복귀했다. 스탈린은 야고다의 복귀를 마지못해 승인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4년 후 스탈린은 OGPU/NKVD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을 색출하는 데 4년이나 뒤처졌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8]

1934년 7월, 야고다는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 조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안드레이 비신스키와 협력하여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을 조직했고, 1936년 8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레프 카메네프를 처형하며 대숙청의 시작을 알렸다.[18] 그러나 스탈린은 점차 야고다의 일 처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야고다가 공개 재판에 대한 해외의 부정적 여론과 국내의 동정 여론을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를 숙청 중단 요구로 받아들여 격분했다.[19] 또한 스탈린은 야고다가 키로프 암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오흐라나와 연계되었다는 "증거"를 조작하는 데 실패했다고 여겼다.[19]

1936년 8월, 미하일 톰스키가 반혁명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면서, 야고다가 자신을 반대 노선으로 내몰았다고 아내에게 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니콜라이 예조프에 의해 밝혀졌다. 스탈린이 야고다를 불신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야고다가 소비에트 반대 블록의 존재를 더 일찍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18] 결국 1936년 9월 25일, 스탈린은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함께 정치국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우리는 예조프 동지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야고다는 분명히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을 폭로하는 데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GPU는 이 문제에 대해 4년이나 늦었다. 지역의 모든 당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NKVD 요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1]


하루 뒤 야고다는 예조프로 교체되었고,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되었다. 야고다가 반대 블록에 대해 늦게 보고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1936년에야 알게 되었다는 설과,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반대파에 대한 공감 때문에 은폐했다는 설이 있다.[18] 반공주의자이자 전 소련 내부자였던 그리고리 토카예프는 야고다가 반대파와 협력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2][23]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물러난 후, 야고다는 우편통신부 장관이 되었으나 1937년 3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이전 카를 라데크 등이 기소된 재판에서 이들의 죄목이 단지 스탈린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여 스탈린의 분노를 샀다. 1938년 3월, 야고다는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과 함께 소위 "21명의 재판"(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 회부되어 국가에 대한 반역 및 음모 행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필사적인 사면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판 직후 한때 자신의 다차였던 코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처형되었다. 처형 전, 당시 내무인민위원장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는 간수에게 명령하여 야고다를 발가벗기고 심하게 구타하며 모욕했다고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예조프 역시 2년 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숙청되어 야고다와 같은 길을 걸었고, 베리야 또한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야고다의 가족 대부분도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4. 2. 체포와 재판

내무인민위원회(NKVD)에서 물러난 후 우편통신부 장관이 되었으나, 1937년 3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전 카를 라데크 등이 기소된 재판에서 이들의 죄목이 단지 스탈린의 정적이기 때문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고, 8년 전 부하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후임자인 니콜라이 예조프는 야고다가 1917년 당 가입 이후 다이아몬드 밀수, 부패, 독일 첩자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예조프는 야고다가 자신의 사무실 주변에 수은을 뿌려 자신을 암살하려 했으며, 막심 고리키와 그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혐의도 제기했다. 야고다의 모스크바 아파트 두 채와 별장에서는 여성 의류, 포르노 사진 3,904장, 포르노 영화 11편, 외설적인 조각이 새겨진 파이프 165개, 고무 딜도 1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살해한 총알 2개, 트로츠키주의 서적 549권 등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24] 예조프는 야고다의 아파트를 차지하고 집 세 채를 장식하는 데 400만러시아 루블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1938년 3월, 야고다는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등과 함께 반소 "우파 및 트로츠키주의자 블록" 재판(소위 "21명의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다른 대부분의 혐의는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25]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야고다가 재판 중 스탈린의 관용을 기대하며 "당신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을 위해 두 개의 거대한 운하를 건설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묘사했다.[26][27]

필사적인 사면 탄원에도 불구하고, 야고다는 재판 직후인 3월 15일, 한때 자신의 다차였던 코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28] 처형 전, 야고다는 예조프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다긴에게 심하게 구타당했으며,[29] 부하린과 함께 다른 사형수들의 처형을 지켜보도록 강요받은 뒤 마지막으로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야고다의 가족 대부분(부모, 아내 등)도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으며, 아들 겐리흐(1929년—2003년)만이 살아남아 훗날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야고다를 따르던 NKVD 대원 약 3,000명도 이 시기에 숙청되었다.

한편, 야고다를 처형시킨 예조프 역시 2년 후 후임자인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었고, 베리야 또한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1988년 재판 50주년을 맞아 소련 당국은 야고다를 제외한 다른 20명의 피고인에 대한 혐의를 취소하고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재판 자체가 거짓 자백에 근거했음을 인정했다. 야고다는 이 재판의 피고인 중 유일하게 사후 재활되지 못했다.

4. 3. 처형

1937년 3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야고다는 체포되었다.[24] 후임자인 니콜라이 예조프는 야고다가 에 가입한 1917년 이후 다이아몬드 밀수, 부패, 독일 첩자 활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예조프는 야고다가 자신의 사무실 주변에 수은을 뿌려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비난했으며, 막심 고리키와 그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혐의도 제기했다.[24] 야고다의 아파트와 별장에서는 다량의 포르노 사진과 영화, 관련 물품,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살해한 총알 등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24] 예조프는 야고다의 아파트를 차지하고 장식하는 데 400만러시아 루블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야고다는 이전 카를 라데크 등이 기소된 공개 재판에서 이들의 죄목이 단지 스탈린의 정적이었기 때문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여 스탈린의 분노를 산 바 있으며, 과거 부하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점도 스탈린의 눈 밖에 나는 원인이 되었다.

1938년 3월, 야고다는 21인 재판에서 반역죄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5] 그는 스파이 혐의는 부인했지만 다른 대부분의 혐의는 인정했다.[25]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따르면, 야고다는 재판 중 스탈린의 관용을 기대하며 "당신을 위해 두 개의 거대한 운하를 건설했습니다!"라고 직접 자비를 구걸했다고 한다.[26][27]

재판 직후 야고다는 즉결 처형되었다.[28] 처형 전, 예조프의 명령으로 간수 이스라엘 다긴에게 옷이 벗겨지고 심하게 구타당하는 모욕을 겪었다고 전해진다.[29] 처형 당시 야고다와 부하린은 다른 사형수들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도록 강요받았으며, 가장 마지막에 총살되었다.[29]

아이러니하게도 야고다를 숙청한 예조프 역시 2년 후 베리야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었고, 베리야 또한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되는 운명을 맞았다.

1988년 소련 당국은 21인 재판의 다른 피고인 20명에 대해 사후 복권을 시행하며 재판이 거짓 자백에 근거했음을 인정했지만, 야고다는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했다.

5. 유산과 평가

체카-GPU 명예 직원 배지 2개, 적기훈장 2개, 노동적기훈장, 레닌 훈장을 수여받았다.

참조

[1] 서적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Phoenix 2004
[2] 서적 The Case of the Anti Soviet Bloc of Rights and Trotskyites, Verbatim Report People's Commissariat of Justice of the U.S.S.R. 1938
[3] 서적 Ягода. Смерть главного чекиста (сборник) https://books.google[...] Litres 2014
[4]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Stalin's Crimes
[5] 서적 I Dreamt Revolution Henry Regnery Company
[6] 서적 The Life of a Chemist: Memoirs of Vladimir Ipatieff Stan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is I Cannot Forget Pandora
[8] 서적 I Was Stalin's Agent The Right Book Club
[9] 서적 The House of Government http://dx.doi.org/10[...]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08-07
[10] 웹사이트 Gulag, The Storm projects – The White Sea Canal http://www.gulag.eu/[...] 2011-08-28
[11] 웹사이트 Russia: Stalin's Mercy https://web.archive.[...] 1937-07-26
[12] 웹사이트 Russia: Canal Heroes https://web.archive.[...] 1933-08-14
[13] 서적 The House of Government http://dx.doi.org/10[...]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08-07
[14] 문서 The Secret File of Joseph Stalin: A Hidden Life Routledge 2004
[15] 서적 Fear and the Muse Kept Watch, The Russian Masters – from Akhmatov and Pasternak to Shostakovich and Eisenstein – Under Stalin The New Press
[16] 서적 Fear and the Muse Kept Watch
[17] 서적 The Murder of Maxim Gorky: A Secret Execution Enigma Books
[18] 서적 Origins of the Great Purges
[19] 서적 The Secret File of Joseph Stalin: A Hidden Life https://books.google[...] Frank Cass Publishers 2001
[20] 서적 One Who Survived G.P. Putnam 1945
[21] 서적 Let History Judge 1971
[22] 서적 Origins of the Great Purges
[23] 서적 Comrade X
[24] 서적 Near and Distant Neighbors: A New History of Soviet Intelligence
[25] 서적 Report of Court Proceedings in the Case of the Anti-Soviet 'Bloc of Rights and Trotskyites' https://archive.org/[...] People's Commissariat of Justice of the USSR
[26] 문서 The Gulag Archipelago Harper & Row 1973
[27] 뉴스 'The Gulag Archipelago, 1918–1956' Solzhenitsyn on Purge Trials of the 30's https://www.nytimes.[...] 1973-12-30
[28] 웹사이트 Лаврентия Берию в 1953 году расстрелял лично советский маршал http://www.newsru.co[...] 2010-06-24
[29] 웹사이트 Group Picture of Soviet Assassins: The Trajectory of Stalinist Executioners from the Revolution to the Great Terror https://www.research[...]
[30] 서적 Ordinary Citizens, the Victims of Stalin Francis Boutle 2003
[31] 문서 A Century of Ambivalence: The Jews of Russia and the Soviet Union, 1881 to the Present Indiana University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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